
친애하는 X — 사실 제일 불쌍한 건 백아진이었다
김유정 연기 잘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. 근데 이건 좀 달랐어요. 보자마자 느껴지는 게 있었거든요. 눈이랑 표정이 그냥 백아진 자체예요.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.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 캐릭터인데 과하지 않아요.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소름 돋는 거예요. 다 보고 나서 한참 멍했어요. 무겁고 무섭고 안쓰럽고 짠한 감정이 한꺼번에 오는 드라마예요.
감정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인데, 미워하기가 어렵다
백아진이 나쁜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요.
나쁜 의도로 사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, 그냥 감정이 없는 사람이 살아남는 방식이 그거였던 거거든요. 태어날 때부터 공감 능력이 결여된 채 자란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,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망가지는 이야기. 설명만 들으면 그냥 사이코패스 범죄극처럼 들리는데, 이 드라마는 그 틀에서 한 발 더 나아가요.
그 지점이 이 드라마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눈을 못 떼게 만드는 이유예요. 미워하기도 애매하고,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캐릭터. 근데 그 사람을 계속 보게 되는 건, 백아진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너무 진심이었기 때문이에요. 그 사랑이 결국 그 사람들을 망가뜨리는데, 그게 보면서 계속 마음에 걸려요.
1화 그 장면 하나로 다 설명됐다
1화 학교 씬에서 선생님 보내버리는 장면 있잖아요.
그 장면 하나로 백아진이 어떤 사람인지 다 설명이 돼요.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, 사람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. 대사 한 줄 없어도 그냥 보이는 거예요. 이 캐릭터 범상치 않다는 게 1화에서 이미 확정되는 느낌이에요.
보통 드라마가 캐릭터 설명하는 데 몇 화씩 쓰잖아요. 근데 이 드라마는 1화에서 백아진을 완벽하게 소개해요. 그래서 첫인상이 강렬했던 것 같아요. 그게 가능했던 건 김유정 덕분이에요.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, 표정 하나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전달하는 능력. 말이 많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알아요. 감정이 없는 사람이 감정 있는 척할 때의 그 미묘한 차이. 그걸 김유정이 너무 정교하게 잡아냈어요.
김오재랑 준수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
백아진 주변 사람들 보는 게 솔직히 힘들었어요.
김오재랑 준수 둘 다 백아진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데 그 마음이 결국 본인들을 죽게 만들잖아요. 보면서 계속 안쓰러웠어요. 저 사람이 왜 저러지 싶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.
근데 준수 생각을 좀 더 하게 됐어요. 만약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, 준수가 그냥 백아진을 있는 그대로 두고 둘이 사랑하게 내버려뒀다면 어땠을까. 본인이 생각한 사랑의 방식이 백아진을 더 몰아세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어요. 백아진을 변화시키려 했던 그 마음 자체가 결국 비극을 만든 거거든요.
여기서 드라마가 건드리는 게 있어요. 사랑하는 방식이 틀릴 수 있다는 것.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는 사랑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만든다는 것. 준수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, 그 사랑의 방식이 백아진한테는 맞지 않았던 거예요. 사랑인데 비극이 되는 이유가 그거거든요.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방식은 다른 문제니까요.
카페 사장님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. 백아진한테 진짜 필요한 사람이 그 사람이었거든요.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옆에 있어주는 사람. 백아진을 바꾸려 하지 않고, 이용하려 하지도 않고, 그냥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람. 근데 그 사람 가지고는 백아진이 멈출 수 없었어요.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으니까요. 타이밍이 틀렸던 거예요.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는데 백아진이 그걸 알아보기엔 너무 늦어버린 거고요. 다른 순서였다면, 다른 시간이었다면. 근데 드라마는 그 아쉬움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아요. 그냥 보는 사람 마음에 남겨두고 가거든요.
⚠️ 아래부터 결말 스포 있어요
결국 백아진 혼자 살아남아요.
남편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속박하니까 죽음으로 위장한 거고, 백아진은 또 어딘가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이용하며 살아갈 거예요. 겉으로 보면 백아진이 이긴 것 같아요. 살아남았으니까요.
근데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백아진이 제일 불쌍하다는 거예요. 감정이 없으니까 사랑을 받아도 모르고, 누군가 진심으로 곁에 있어줘도 이용할 대상으로밖에 못 보는 거잖아요. 백아진이 나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. 근데 세상은 그걸 용납하지 않으니까 계속 싸워야 하고, 이용하고, 살아남아야 하는 거예요.
이 결말이 불편한 이유가 있어요. 백아진이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에요. 백아진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게 보이기 때문이에요. 끝이 없는 거예요. 살아남는 게 이긴 게 아닌 삶. 그게 백아진의 삶이고, 그게 제일 무서운 부분이에요.
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을까.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. 근데 이 드라마 보고 나서 그 질문이 오래 남았어요. 백아진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드라마예요.
다 보고 창을 닫았는데 바로 딴 거 못 틀겠더라고요. 백아진 생각이 한참 났어요. 저 사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거라는 게. 그게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 모르겠어요. 무겁고 무서운데 이상하게 안쓰럽고 짠한 드라마예요. 소리 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드라마요.
tvN | 2025.09.27 ~ 11.01 | 12부작 | 김유정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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